┃ 현강재 소개각종 소송강제집행 등인터넷등기등  기답변서게시판법률상담실영혼의 샘참  고유관기관업무관련




궁지에 처한 사람들을 20여년 상대하다 보니 법무사 K는 사무실에 들어서는 고객의 표정만 봐도 무슨 일로 왔는지 대충 감을 잡는다. 아마 K에게 그런 직감이 없었다면 이 사건의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동료 법무사 L의 심상찮은 표정을 건성으로 넘겼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지?” K의 물음에도 처음 L은 자존심 때문인지 별 것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거듭된 추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북한강가에 전망 좋은 토지를 소유하고 주유소와 식당을 경영하는 유병길(가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L의 사무실에 그 유병길의 딸과 친구인 직원이 근무하는 인연으로 유병길의 처가 L의 사무실에 출입하게 됐다. 유병길은 자신의 아버지 소유인 임야 10만여 평을 증여 받을 때 자신의 처를 시켜 L에게 등기절차를 의뢰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유병길의 처는 남편이 시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10만여 평의 토지를 조금씩 잘라 매매를 하곤 했다.
그런데 안면 때문인지 그녀는 일을 대충대충 하려고 했다. 등기를 하려면 등기권리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없으면 본인이 사무실에 나와 확인서면이란 용지에 우무인(지장)을 찍어야 한다. 그녀는 가끔 등기권리증을 은행에 맡겨놨다면서 확인서면 용지를 달라고 하여 남편의 지문을 찍어왔다. 게다가 매도용 인감증명서는 자신이 대리로 발급 받아오곤 했다.
일을 갖다 줘서 고맙긴 하지만 L은 이렇게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친구 엄마이므로 괜찮다는 직원의 말 때문에 몇 번을 참다가 여자에게 남편을 한 번 모셔오라고 했다. 본인확인 없이는 더 이상 등기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L의 단호함에 못이긴 척 마침내 5번의 등기 만에 땅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재산가답지 않게 사람은 참 수수했다. 별 거드름도 없이 유병길은 확인서면에 지문을 찍었고 L은 그의 주민등록증 사진과 실물을 보면서 본인확인을 마쳤다. 그는 주유소 일이 바빠 자주 나오지 못하니 앞으로 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유병길이 한 번 다녀간 뒤부터 그의 처는 3년에 걸쳐 같은 방식으로 거의 30여건의 소유권이전등기를 L에게 맡겼다. 그런 중에 IMF사태가 터졌다. 토지거래가 시원찮은지 유병길의 처는 차츰 발길을 끊었고 그 사건의 매개가 되었던 직원도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L은 어느새 그들 부부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L법무사 증언 시 제출한 확인서면, 지문이 처의 것으로 밝혀져 ‘위증죄’

2005년 7월 어느 날, L에게 증인소환 통지서가 배달되었다. 원고는 유병길이었고 피고는 L이 마지막으로 그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준 석길서(가명)라는 사람이었다. 그 마지막 이전등기는 평소와 달리 면적이 거의 30,000평이나 되었다. 그때 듣기로는 매수인인 석길서가 택지로 개발을 해서 그 이익을 유병길과 나눈다고 했는데 무슨 소송인가 싶었다. L은 피고 측 변호사 사무소에 전화를 해봤다.
“유병길은 그 부동산을 석길서에게 매도한 사실이 없는데 자기 처가 인감도장을 훔쳐서 넘겼대요.”
사무장의 볼멘소리를 들으면서 L은 갑자기 어리벙벙했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사무장은 계속해서 유병길이 토지매매와 관련하여 일을 추진했던 자신의 처와 처남을 사문서위조죄로 고소를 했고, 두 사람은 고소내용대로 자백을 하여 처는 기소유예, 처남은 집행유예를 받았으며 이 형사결과를 가지고 이전등기 무효소송을 제기했다고 들려주었다. 우리가 증인신청을 했어요. 수화기를 통한 사무장의 마지막 목소리가 귀를 멍하게 했다.  
L은 다른 일을 팽개쳐놓고 처음 유병길의 처가 맡긴 사건부터 마지막 등기과정까지 관련서류를 모두 꺼내 정리를 시작했다. 새삼 유병길을 한 번 만났을 뿐, 그동안 모든 등기가 그의 처를 통해 이뤄진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동안 모아놓았던 확인서면철을 뒤졌다. 유병길이 한 번 찾아와서 찍었던 그 확인서면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문서철을 십 수번 꼼꼼히 뒤졌지만 해당 문서가 없었다. 문서보존연한이 5년이므로 당시 작성하여 등기소에 제출했던 확인서면은 폐기된 뒤였다. L은 그동안 유병길의 등기사건을 직원에게만 맡겨두었던 일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그 직원 역시 7년 전에 일어난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짐작컨대 여러 정황으로 봐서 한 장 남은 그 서면도 다른 등기를 하면서 사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날 작성했던 것이 아니어도 그의 처가 집에서 찍어온 문서는 많이 있었다. L은 유병길이 사무실에 왔던 날 바로 직전과 직후에 작성된 확인서면 2장을 가지고 법정에 출석했다. 선서를 한 후 유병길이 꼭 한 번 사무실에 왔던 일, 향후 자기의 처에게 등기절차를 위임하겠다고 말한 사실을 진술하면서 가지고 간 확인서면 2장을 제출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그 확인서면에 찍혀 있는 우무인이 유병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병길 처의 지문이었다. 남편 것이 아닌 자신의 지문을 찍어서 가져온 것도 모르고 L은 ‘바로 이것이 유병길의 지문’이라고 진술을 했던 것이다. 잘못된 증언이었다.
유병길은 L을 위증죄로 고소했고 이런 결과 때문에 재판부는 L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유병길과 석길서 간 민사소송 1심은 원고 승소로 판결이 났다. 유병길은 이 판결을 근거로 L이 처리했던 나머지 등기 전부에 대하여도 무효의 소를 제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위증죄의 재판은 검찰을 거쳐 기소가 된 상태였다.

남편의 방문과 등기위임 사실,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L로부터 그간의 진척사항을 들은 후 K는 L이 확보한 유병길 관련 문서를 전부 넘겨받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병길의 토지는 모두 타인에게 처분이 되었고 어찌된 셈인지 주 수입원이었던 주유소와 식당까지 경매로 넘어가고 없었다. 유병길의 처는 가출한 상태였고, 그는 8명의 자녀와 함께 친지의 건물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던 그에게 브로커가 붙은 것 같았다. 3년 동안 30여회 이전등기를 하는 도중 단 한 번, 본인 확인만 한 법무사 사무소의 습관적인 방심, 그리고 유병길이 등기를 위임했던 유일한 단서인 확인서면이 모두 없어진 점을 이용하여 벌인 음모였다.
살펴본 바에 의하면 원래 유병길은 집안 살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았던 부동산에서 일정한 수익이 나오는 것을 믿고 많은 자녀와 주유소, 식당 종업원 등 2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뒷바라지는 모두 그의 처에게 일임하고 낚시나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사태를 수습할 증거로 되지는 못했다. 우선 시급한 것이 위증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만일 위증죄로 확정되면 유병길은 L의 사무실에 간 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렇게 처분된 모든 부동산은 본인의 확인절차 없이 진행되었으므로 원인무효가 될 것이다. 아무리 IMF사태로 부동산 거래가 뜸하다지만 석길서에게 넘겼던 토지는 이미 분할과 함께 택지로 개발이 되어 평당 70만원을 호가하고 있어서 그것만 계산해도 210억 원이 되었다. 그 책임은 고스란히 L에게 부과될 것이니 가히 대재앙이었다.
L은 이 결과를 감당할 방법이나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책임회피의 문제가 아니라 법무사의 자존심과 사회정의의 문제였다. 원래 이 토지를 부친으로부터 증여받을 때 그 등기를 L이 대행했으므로 지난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으면 다른 절차의 하자는 치유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문서가 폐기되거나 사라져버린 마당에 그 입증이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K는 L의 처지가 너무 딱해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밤새 사건기록을 뒤적이며 고심하다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K는 꿈속에서 뭔가를 퍼뜩 떠올리며 눈을 번쩍 떴다.
“아! 인감증명서 발급대장…!”

은행 근저당은 위임, 이전등기는 훔친 인감? 거짓소송 모의

옛날 고시공부 하던 시절, K는 간간이 동 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땐 모든 증명서를 일일이 대장에 적어 발급사실에 대한 근거를 남겼다. 특히 인감증명서 발급대장에는 신청자의 도장과 지문이 나란히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K는 10만여 평이나 되는 토지를 분할하거나 매도를 하는 중 유병길의 인감증명서가 엄청나게 발급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미 항소장을 제출한 피고 석길서의 편에 L을 보조참가 시키고 재판부에 관할 면사무소에서 보관 중인 10년간 인감증명서 발급대장의 인증등본 신청서를 냈다.
 그런 중에도 L은 형사법정에 피고인으로 출석하여 재판을 받았다. 법무사로서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K는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라고 L을 다독였다. 어떻게 하든 실형이 떨어져 법무사를 휴업하는 일이나 거액의 돈을 변상하는 최악의 경우는 피해야 했다. 마침 항소법원에 도착한 인감증명서 발급대장을 복사해 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정리해 나갔다.    K의 예상이 맞았다. 10년간 유병길의 인감증명서 전체발급 건수는 151건이었는데 그 중 142건이 처가 대리한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L의 사무실에서 등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3년 동안 발급된 인감증명서는 모두 55건이었고 그중 51건이 그의 처가 대리한 것이었다. 인감도장을 갱신하던 2건을 포함하여 4건만 유병길이 직접 받은 것으로 나와 있었다. 이 인감갱신은 위 3년의 기간 내에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유병길의 주장대로라면 그의 처가 3개의 인감도장을 계속 훔쳤다는 말이었다.
내친 김에 K는 법원 경매계에서 유병길 소유의 주유소와 식당이 경매될 때 그 원인이 되었던 근저당권 관련 문서를 모두 복사해 왔다. 그 원인문서는 은행에서 10억 원의 대출을 받은 뒤 13억 원의 근저당권을 설정한 기록이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때에는 반드시 본인이 대부계에 출두하여 자필 서명을 하게 되어 있고, 13억 원의 근저당권 설정등기를 할 때 제출된 인감증명서 역시 그의 처가 발급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짜는 L의 사무실에서 등기를 처리하던 기간 내였다. 그러니까 근저당권 등기를 할 때 유병길이 현장에 나왔다는 것은 인감증명 발급도 위임을 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근저당권을 설정할 때에는 위임을 했고, 같은 기간에 처리된 L사무소의 이전등기를 할 때에는 도장을 훔쳤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K는 이 인감 관련 기록을 정리하고 분석한 내용을 항소심 법원에 준비서면으로 제출했다. 또한 형사법원에도 같은 문서를 첨부, 부동산 처분에 관하여 부부간 위임이 있었던 점, 그리고 L이 서면을 잘못 제출했던 민사재판의 쟁점은 유병길의 처가 남편의 위임을 받지 않고 부동산을 처분하였는가에 있지, 유병길이 L의 사무소에 언제, 몇 번 갔는가가 아님을 강조하는 변론서를 제출하면서 ‘증인의 증언이 기억에 반하는 허위진술인지 여부는 당해 신문절차에 있어서의 증언 전체를 일체로 파악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이고 증언의 전체적 취지가 객관적 사실과 일치되고 그것이 기억에 반하는 공술이 아니며, 사소한 부분에 관하여 기억과 불일치하더라도 신문취지의 몰이해 또는 착오에 인한 것이라면 위증이 될 수 없다’는 대법원 94도1790호 판례의 내용을 곁들였다.

변론이 종결된 뒤 지루하고 답답한 기다림 끝에 민사사건의 항소심 판결이 먼저 났다. 1심판결은 원고와 그의 처, 처남이 짜고 고소를 한 뒤 범죄의 자백을 한 형사사건을 기초로 한 것이고, 또한 원고의 처가 남편의 인감도장을 절취하여 3년간 같은 내용의 등기를 했다는 주장은 믿을 수가 없으므로 그에 근거한 1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내용이었다. 2007년 크리스마스 바로 나흘 전이었다.
그리고 이 판결이 있은 지 열흘 뒤인 신년 초에 마침내 형사사건의 결과도 나왔다. 그날 L의 법정진술은 그들 부부의 위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지 그 문서의 진위에 관한 것이 아니었으며, 변론의 전 취지를 보더라도 유병길이 그의 처에게 토지매매를 위임한 것이 인정되므로 비록 L이 법정에 제출한 확인서면은 유병길의 것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그날 진술이 기억에 반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는 내용이었다. 둘 다 완벽한 승소였다.    그날 저녁 K와 L은 장소를 옮겨가며 4차까지 만취상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참으로 짜릿한 해방감을 함께 즐긴 밤이었다. 형사사건은 그 뒤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각각 검사의 항소 및 상고 기각으로, 민사사건도 대법원에서 상고기각으로 확정이 되었다. 악몽 같은 2년 6개월의 세월을 보내면서 L은 정말 성숙하고 신중한 법무사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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