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강재 소개각종 소송강제집행 등인터넷등기등  기답변서게시판법률상담실영혼의 샘참  고유관기관업무관련



요즘 세상에 죽을 때까지 사람답게 그리고 여유롭게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어야 할까. 열심히 일해 가족을 부양하고 먹고 싶은 것 가려 먹을 정도는 되지만 K법무사는 여태 그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거나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돈 역시 다다익선이라고 장담을 하긴 한다. 그러나 가끔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의 비보를 접하면서 갑자기 너무 많은 돈을 움켜쥐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고 정도껏 벌어서 사람답게 사용한다면 그것도 복이 아닐까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L할아버지 사건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K는 이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L할아버지가 처음 K법무사에게 의뢰한 일은 차임을 장기연체하고 있는 임차인의 처리문제였다. 부인과 사별하고 변두리의 15평짜리 낡은 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던 L할아버지의 직업은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부인이 사망한 뒤 집이 너무 적적한 것 같아서 반찬값이나 하려고 노동일을 하는 사람에게 방 한 칸을 월 10만원에 세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차인이 벌써 10개월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세도 주지 않고 있으니 그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K는 우선 임차인을 상대로 명도소송을 제기하였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송달불능이 된 소송서류는 야간특별송달을 거쳐 공시송달로 처리한 뒤 판결을 받았다. 판결이 확정되자 집행관의 요청으로 보증인 2명 참여하에 문을 열었다. 방에는 이동용 옷장 1개와 이부자리 몇 개, 그리고 부엌에 식기와 취사도구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이 물건들은 L할아버지의 창고에 넣어놓고 보증인이 보는 앞에서 사진촬영을 해두었다.

그 일이 끝난 뒤 L할아버지는 별다른 일이 없는데도 수시로 K의 사무실에 들락거렸고 때론 생활비가 떨어졌다면서 약간의 돈을 빌려가기도 했다. 일흔 넷이라는 나이보다 늙어 보이기는 했으나 상당히 성격이 좋았고 사귐성이 있는 분이었다. 간간이 들려주는 말에 의하면 L할아버지에게는 3남 1녀가 있는데 맨 위가 장녀로 약사라고 했다. 세 명의 아들들은 직업이 시원찮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지만 딸은 살만 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용돈은 제대로 타 쓰세요?”
K는 이 할아버지가 생활비가 부족하다면서 가끔 돈을 빌려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딸이 약사라는 말이 잘 믿기지 않아서 그렇게 물었다.
“아녀. 지독한 노랭이랑게. 가끔 만 원짜리 한 장 내밀면서도 벌벌 떠는 년이여.”
그렇게 말하면서 L할아버지는 참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어디서 약국을 하는데요?”
약사라면 늙어 혼자 된 아버지의 생활비 정도는 부담해도 될 텐데 싶었다. 아무리 상처한 노인네라지만 늘 꾀죄죄한 차림새나 외모로는 의지가지없는 외톨이로 뵈기 십상이었다.
“길목이 좋은 데야. 번화가고….”
아들들 이야기를 할 때와 딸의 주변에 대하여 들려줄 때의 표정이 분명 달랐다. 뭐랄까, 딸 이야기를 할 때에는 애증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남에게 자랑은 하고 싶은데 뭔가 입을 막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노인이 요령부득으로 설명하는 곳을 지도로 표시하며 대충 살펴보니 평당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K시의 중심가였고 병원 밀집지역이기도 했다.
“와 이런 곳에서 약국을 하면 돈을 많이 벌겠는데요?”
“많이 벌면 뭐해. 쓸 줄을 모르는데….”
“식구가 많은가 보죠?”
“누가? 딸이? 아녀. 독신이야. 혼자 살어.”
노인은 또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올해 쉰 인디, 아직 결혼도 안했어. 그러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설핏 내비췄다.
“스물셋에 낳은 딸인디 공부도 지 혼자 했어. 내가 어디 아이들 핵교 보낼 형편이간디? 늘 입에 풀칠하기 바빴재.”
“그렇다고 약사를 하면서 가족들 부양한 것도 아닌데 왜 여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누가 알어? 결혼이나 남자 얘긴 꺼내지도 못하게 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K는 L할아버지의 가족들에 대하여 대충 감을 잡아나갔다. 그리고 늘 약국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아들들의 모습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자녀들 이야기를 해주고 간지 대략 6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L할아버지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K를 찾아왔다. 주름투성인 눈 주위가 한껏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며칠 계속 울었던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리 초라한 입성이었어도 늘 웃고 다녔던 노인이었다.
“허허 참….”
노인은 소파에 앉은 채 또 한참동안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단단히 생긴 게 틀림없다 싶었지만 K는 노인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딸이 죽었어.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야단이더니 고작 그렇게 되져 버릴 걸 가지고….”
한참 만에 들려주는 노인의 한탄을 듣는 순간 K는 그 딸의 불행보다도 노인에게 상속될 재산이 얼마나 될까를 먼저 생각했다. 노인의 말이 맞다면 딸의 재산은 모두 그의 차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말부터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다가요? 어쩌다가 그렇게 갑자기…? 이제 갓 쉰이라면서요.”
“누가 아니래나? 약사니까 건강관리 하나는 철저하게 했을 낀디 급사를 해버렸당게. 며칠 약국 문을 열지 않아서 들어가 보니 그 지경이지 뭐여. 의사 말로는 심장마비라는 기여.”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궁색한 그녀 동생들이 약국에 들이닥쳐 벌였을 행태가 눈에 선했다. 물론 이런 상상은 L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K는 노인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몇 가지 문서를 준비해보라고 권했다. L할아버지의 제적등본, 가족관계증명서, 딸의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재산목록을 적어오라고 했다.
“다른 것은 알것는디 재산은 몰러. 지년 살아생전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혀서 전혀 몰러. 무슨 재산이 있는지….”
“우선 파악되는 것만 가져와 보세요. 그리고 따님 거처에 신용카드나 예금통장은 있는 대로 챙겨놓으세요.”
남의 상례에 경우가 아니지만 그래도 재산의 뒷수습은 제대로 해주고 싶었다. L할아버지와 인연이 닿은 지 어언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사이였다.

사흘 뒤, L할아버지가 가져온 호적관련 서류를 검토해보니 딸에게는 아버지와 남형제 3명 외에는 아무 가족이 없었고 부친 단독 상속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재산목록이었다. 25살부터 약사를 시작했다고 하니 25년간 가족도 없이 축적했을 재산이 적지 않을 것 같았다. K는 노인이 가져온 딸의 주민등록지 주소와 약국주소부터 검색을 해나갔다. 거주지 아파트는 딸의 소유였다. 표준공시지가로 6억 원 정도가 되었고 그리고 약국이 속해있는 3층 상가 역시 전체가 딸의 소유였다. 건물은 건평이 100여 평이었고, 토지가 35평이었는데 공시지가로도 30억 원을 호가했다. 그 건물에는 1층에 20평의 약국 외에 15평의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1곳, 2층 전체는 컴퓨터 게임실로 사용하고 있었고, 3층은 건설회사와 물품대리점 등 3개의 업체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에는 커피숍이 들어 있었다. 후일 노인이 조사해온 건물의 임대료 수입을 보니 매월 1천만 원이 넘었다. 그런데 노인은 임대차계약서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이넘들이 감춘 것 같어. 약국에 있던 현찰은 물론이고 통장이나 카드까정 모두 가져가 버렸능가벼.”
“어떻게 하시겠어요?”
K는 노인의 의사대로 일을 추진해줄 요량으로 물었다. 죽은 누나의 재산을 훔쳤다면 상속인인 아버지의 재산을 훔친 것이어서 친족상도례의 적용을 받으므로 처벌이 어려울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고소과정을 통하면 그 실상과 유산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긴. 지놈들도 묵고 살어야지. 그냥 넵둬.”
“그럼 부동산만 등기를 하시렵니까?”
“어찌문 되는디?”
피상속인의 주변이 혼잡한 것 같지만 상속관계는 단순한 경우였다. 방계혈족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피상속인 1인과 상속인 1인인 단독상속이었다. 저축금이나 현금 따위에 관심이 없다면 상속절차에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딸이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와 등기과정에서 찾아낸 소형 아파트 1채를 처분하여 겨우 상속세와 등기비용을 마련한 L할아버지는 마침내 상가건물의 소유자가 되었다. 등기 후 석 달 만에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근엄한 표정으로 K앞에 나타났지만 K는 노인이 그동안 뭔가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항상 장난기가 느껴질 정도로 눈웃음이 떠나지 않던 예전의 표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여. 건물이 크면 뭐허구, 시가가 비싸문 뭐허녀구. 당장 세입자가 나간다고 보증금 내달라면 내가 무슨 재주루 1억이 넘는 돈을 만드냔 말여.”
그러면서 세 들어있는 업체의 보증금만 7억 원이 넘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방금까지 곧추 세웠던 목이 어느새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세입자들에게 건물주인이라는 행세를 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과장된 동작임이 분명했다.
“그러면 건물을 팔아 버리세요. 팔십이 되면 돈을 쓰고 싶어도 못쓴대요. 뭐하려고 그런 고생을 하고 마음을 졸이며 사세요?”
“그러게 말여. 그렇잖아도 팔라고 조르는 인사가 몇 있어.”
노인은 또 슬프게 웃었다. 딸과 아들들의 무관심 속에서 형성되었던 그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거액의 재산이 생겼으니 활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슬프게 웃지 말고 환한 얼굴, 만면의 미소를 띠면서 말이다. 그런데 노인은 뭔가를 주섬주섬 품에서 꺼내 K에게 내밀었다. 복사된 2장의 차용증이었다.
“딸의 소지품에서 나왔는디, 도대체 이게 뭐여?”
액면금액이 3억 원과 5억 원으로 된 것으로 둘 다 딸의 인감도장이 찍힌 문서였다.
K는 2장의 차용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작성일이 2년의 시차가 있는데 필체나 그 문구가 비슷한 것이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누구지요?”
대주의 이름이 적힌 곳을 짚으면서 물었다.
“하나는 3층의 무슨 대리점 사장이고, 하나는 지하 커피집 주인의 것이라는 구먼.”
“뭐라고 그래요, 그 사람들은…?”
“글씨, 맞다고는 허는디, 뭔가 느낌이 이상혀.”
순간 K는 망자의 예금통장과 약국의 현금을 싹쓸이해갔다는 그집 아들들의 행색을 떠올렸다. K는 노인에게 약국장부를 가져오도록 한 뒤 이 차용증과 함께 필적감정소에 보냈다. 언젠가 약국관리는 직접 하고 월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가족들도 전혀 모른다는 말을 들은 터라 장부는 직접 정리했을 거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만일 이 차용증이 액면 그대로 채무라면 그 차용금 8억 원과 임대차 보증금 7억 원을 제하고 나면 건물을 처분한다고 하더라도 15억 원 정도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노인 혼자만 생각한다면 노후자금으로 적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렇잖아도 하이에나처럼 기회만 노리고 있는 아들들이 그냥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열흘 만에 필적감정 결과가 나왔는데 2장의 차용증은 한 사람의 글씨였지만 장부의 작성자와는 전혀 달랐다. 장부의 글씨를 흉내 내긴 했으나 필의 방향과 각도, 필획 간의 크기, 크기 비율, 필순에 의한 운필의 순서, 필세 등의 운필상태, 그리고 문자를 구성하고 있는 점과 선의 상호 길이 비율 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K는 차용증에 대주로 적혀 있는 식당주인과 대리점 사장에게 이 감정서의 내용을 보였다.
“나는 잘 몰라요. 할아버지의 아드님들께 물어 보세요.”
그들은 바로 발뺌을 해버렸다. 역시 아들들의 장난이었다. 그들은 이 건물을 인근의 공인중개사 5곳에 매각의뢰를 해놓고 있었다. 차임 역시 L할아버지에게는 얼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남의 가정사에 더 이상 개입을 할 수가 없어서 K는 노인에게 재산과 차임의 권리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건물이 팔리든, 그대로 있든, 할아버지 살 궁리는 해놓으세요.”  
일흔 다섯이면 아직 10년 이상은 돈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1년쯤 지났을 무렵 K는 L할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아직 정정하던 노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인지, 사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지만 무위도식하던 아들 3형제의 등살에 그 노후가 아파트 경비원 시설만큼 편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추측을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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