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강재 소개각종 소송강제집행 등인터넷등기등  기답변서게시판법률상담실영혼의 샘참  고유관기관업무관련



도로변이긴 하지만 사무실이 외진 탓인지 법무사 K는 자포자기 상태에 처한 고객들을 자주 대한다. 작년 이맘때 사무실 문을 빠끔히 열고 고개만 들이민 채 ‘여기도 마찬가진가?’라며 조심스레 안의 눈치를 살피고 섰던 윤경화 할머니(가명)의 표정에도 그런 체념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법무사 사무실마다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며 묻고 또 물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시냐고 몇 번을 묻고 나서야 못이긴 척 안으로 들어선 윤 할머니는 풀기 없이 웃으며 상담석에 앉았다.
“세상에. 무신 이리 기 막힌 일이 다 있노, 그래.”
신세 한탄하는 모습이 흡사 얼빠진 듯 맥이 없었다. K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한 10여분 그렇게 앉아있었을 것이다. 윤 할머니가 주섬주섬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편과 1남 3녀를 낳아 오순도순 살고 있었는데 남편과 딸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거의 실신상태였던 그녀는 겨우 살아남은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삶의 의지를 추슬렀다. 그래. 누야들 못다한 거 니가 다 해봐라. 오랜 상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딸들의 사망보험금으로 수령한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하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아들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마친 아들은 군대까지 다녀와서 사업을 시작했다. 정말 지 누나들 몫까지 살 욕심이었던지 아들은 하는 일마다 슬슬 풀려 많은 돈을 모았다. 뒤늦긴 했지만 중매를 통하여 결혼도 한 아들은 사업장 부근에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다.
어무이요. 인자 맛있는 거 잡숫고, 좋은 구경하면서 편안히 사시모 됩니더. 궁핍한 생활을 통해 절약이 몸에 밴 그녀에게 아들은 용돈도 듬뿍듬뿍 쥐어 주었다. 그래. 이런 재미와 낙을 볼라꼬 그 고생을 안 했나. 그래. 그래. 내 새끼. 그녀는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자랑과 용돈자랑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옛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좋은 일에는 꼭 마가 꼈다. 아들의 마흔 살 생일이던 석 달 전 어느 날, 지방출장을 다녀오다가 또 교통사고가 났다. 아들은 중환자실에서 열흘을 버티다가 숨을 거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살만큼 산 나는 놔뚜고 지 누야들 몫까지 살아야 되는 저 아아를 데꼬 감미꺼.”
그녀는 1달 내내 끼니도 거른 채 통곡을 하며 지냈다. 사고 후 며느리는 입을 봉했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어 정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 내외가 결혼한 이후에도 함께 살며 잔소리를 하면서 아직 살림을 내주지 않은 것 때문에 며느리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살던 집 팔고 종적 감춘 며느리와 손자의 출생 비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이 집을 샀으니 비워달라는 것이 아닌가.
“무슨 소리요? 이 집은 내 아들 집이라요. 당신이 뭔데 비우라 마라 카는기요? 참 별스런 사람도 다 있대이.”
윤 할머니는 그 사람들을 대문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잠가버렸다. 그런데 그럴 일이 아니었다. 등기권리증을 꺼내 흔들면서 이 집을 당신 며느리로부터 샀노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 앞에서 그만 전신의 맥이 풀려 버렸다. 정말, 그러고 보니 며느리 얼굴 본지가 꽤 오래됐다 싶었다. 말도 없이 친정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인근 도시에 있는 사돈집으로 달려갔다.
“이기 무신 소리고? 아범 집을 우찌 니가 팔아 묵었노?”
그녀는 며느리를 만나자마자 역정을 내며 따지고 들었다. 며느리의 형제들이 몰려왔다. 남편이 죽었으면 처가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 당연한데 왜 이러십니까? 그들은 미안한 표정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했다.
“뭐라꼬? 상속? 그기 뭐꼬?”
“상속도 모르세요?”
그런 비아냥거림은 사돈집에서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웃사람들도 그랬고 아까 버스에서 내려 한 집 한 집 들려본 법무사 사무소 사람들도 모두 그랬다. 상속도 모르면서 이런 곳을 기웃거리는 것이 딱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아들 재산이지만 할머니에게는 상속권이 없어요. 비웃는 것인지 동정하는 것인지 그 말을 들으면서 윤 할머니는 서서히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한 군데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보이는 대로 법무사 사무소는 모두 들어가서 물었다.  
“나는 인자 우짜모 좋심미꺼? 아들이 사놓은 재산을 며느리가 다 가져가모 나는 어찌 살라꼬?”
윤 할머니가 꺼내놓은 통장에는 아들이 주었던 용돈, 70만 원이 고작이었다. K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와 아들의 이름을 물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아들 소유의 부동산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대지 70평과 건평 30평의 건물 한 채, 공장용지 500평에 공장건물 100평짜리 1동, 논 900평, 밭 400평, 모두 공시지가로 12억 원에 달했는데 이미 상속등기를 필했고 집은 다른 사람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가 되어 있었다. K는 윤 할머니의 위임을 받아 사무원을 시켜 상속등기 신청서를 복사해오도록 했다.
아들이 사망한 날로부터 1달이 채 되지 않아 상속등기가 이뤄져 있었다. 아들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처와 자녀 1명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었다. 2살짜리였다. 결국 윤 할머니는 상속권이 없었다. 아들에게 몇 십억 원의 재산이 있더라도 이 할머니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손자가 한 명 있네요.”
“가 때민에 둘이서 많이도 싸웠재. 아들은 지 새끼 아니라카고…. 살림나는 문제로 가들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어예. 며느리가 친정에서 몇 달 지내다 온 적도 있고.”
윤 할머니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래요? K는 그녀의 넋두리를 들으며 상속규정을 재빨리 떠올렸다. 가장이 자식 없이 사망하였을 때 처에게 1.5, 부모에게 1의 지분이 상속된다. 뭔가 윤 할머니를 도울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넋두리가 사실이라면, 손자가 아들의 핏줄이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기왕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쫓아낼 작정을 한 것 같으니까 이 일로 인하여 가정의 평화가 깨질 일은 없을 것이다.

손자와 유전자 불일치, ‘친생자관계부존재 소’ 제기하며 가처분 신청

K는 윤 할머니 집으로 가서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손자의 칫솔과 털모자 속에서 머리카락을 찾아내어 유전자감식을 신청했다. 요즘 이 업무를 취급하는 기관이 많이 생겨 감식비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열흘 뒤 나온 결과는 할머니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유전자는 전혀 달랐다.
K는 이 유전자 검사결과를 가지고 윤 할머니를 원고로 하고 손자(법정대리인 며느리)를 피고로 하여 법원에 손자가 아들의 자식이 아니라는 ‘친생자관계 부존재 소’를 제기하면서 농지와 공장관계 부동산, 그리고 주택의 5분의 2지분에 대하여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보전처분을 담당하는 판사는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보전의 필요성에 대한 보정명령을 내렸다. 유전자 시험성적서를 첨부했음에도 판사는 왜 가처분이 필요하며, 윤 할머니와 며느리, 현 주택 소유자간의 법률관계를 입증하라고 했다. 가히 습관적인 보정명령이었다. 주택이 매매된 사실은 등기부등본에 기재되어 있고 손자가 아들의 혈육이 아닌 것이 입증되면 아들이 남긴 재산 중 5분의 2는 윤 할머니가 상속한다는 사실, 주택을 이미 처분한 며느리는 나머지 부동산도 곧 처분할 예정이라는 부연설명을 하여 보정서를 제출했다.
거의 일주일에 걸쳐 씨름을 하다가 대상 부동산의 등기부에 가처분이 기입되었다. 가사 재판부는 병원을 지정하여 정식으로 윤 할머니와 손자 간에 유전자검사를 할 것을 명령했다. 윤 할머니는 매일 K의 사무실에 나와서 결과를 묻고 또 물었다.
“내가 아들을 어떠키 키웠는데 지 년이 재산을 모두 가로챈단 말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제.”
노인네는 신이 났고 점점 의기양양했다. 분명히 누군가 며느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의 그 추레하고 실성한 듯한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K는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며느리 측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한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유전자감식을 피하고 있는 눈치더니 어느 날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K에게 전화를 했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시죠?”
“적당한 선이라면?”
“2억 원을 드리죠.”
2억 원? 유산에 대한 공시지가를 계산해도 12억 원이 넘었다.
“어떻게 계산한 거죠?”
“계산할 것 뭐 있어요? 적당히 해결하시죠.”
“그렇게는 안 됩니다.”
K는 전화를 끊었다. 다른 부동산은 몰라도 주택에 관해서는 며느리가 애를 태울 만했다. 하자가 있는 부동산을 매도했으니 매수자로부터 형사상 사기죄로나 민사상 매도인의 하자담보책임을 추궁 당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윤 할머니 지분에 대한 거래시가 이상의 금액이 아니면 이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 유전자 감식 불응으로 패소하자 “2억 주겠다” 회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유전자 감식에 응하지 않자 가사 재판부는 두어 번 독촉을 한 후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호적과 가족관계등록부를 정리하고 나니 며느리의 오빠 된다는 사람이 K를 찾아와서 거래를 제안했다.
“법무사님만 입 다물면 그만 아닙니까? 법무사님 몫으로 2억 원을 드리죠. 여기서 그만둔다고 누가 나무랄 것도 아니고 법무사님이 책임 질 일도 아닌데요 뭐. 할머니께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사실 윤 할머니에게는 사건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았다. 아무리 시시콜콜 말해주어도 상속지분이 어떻고 친생자관계부존재소가 뭣인지에 대해 납득할 분이 아니었다. 안심하세요. 잘 될 겁니다. 그런 확신 찬 말만으로 족했다. 그렇지만 K는 그런 돈에 유혹될 법무사가 아니었다.
“사람 잘 못 보셨군요.”
돌아가세요. K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는 욕설을 퍼부은 뒤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찾아올 상속재산 전부에다 처분금지 가처분을 집행해 놓았으므로 서둘 것은 없었다. K는 차분하게 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먼저 당사자 관계를 명시한 뒤 지금까지 상속등기 절차가 취해진 과정, 그리고 피상속인의 아들에 대한 친생자관계 부존재 소의 결과를 적었고 마지막으로 윤 할머니에 대한 법정상속지분에 대하여 명시를 했다.
청구취지는 이미 이뤄진 해당 부동산의 상속등기에 대하여 손자가 상속한 5분의 2 지분은 원인무효로 인하여 소유권이전등기를 말소해 달라고 정리했다. 그냥 이전등기를 구해도 되겠지만 등기를 할 때 취득세에서 차이가 날 것이고, 특히 이미 소유권을 타인에게 넘긴 주택에 대하여는 무효가 아니면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상절차를 취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건이 그렇듯 이 경우에도 합의를 하는 것이 피차간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재판이 윤 할머니의 승소로 끝나더라도 재산분배를 위해서는 모든 재산을 경매로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감정평가액이나 경락가격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결국 상대방의 변호사가 직접 나섰다. 법조 주변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감정평가사에게 실가를 감정하여 그 5분의 2를 지급받았다.
“실버타운 같은 곳은 시설도 좋고 편합니다. 돈 아끼지 마시고 편히 사세요.”
K는 윤 할머니가 내미는 봉투를 고맙게 받으면서 그렇게 당부했다. 그 봉투의 액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K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미 보람이라는 선물을 풍성히 받았다.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보람 있는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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