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강재 소개각종 소송강제집행 등인터넷등기등  기답변서게시판법률상담실영혼의 샘참  고유관기관업무관련



한창 성폭력범에 대한 사회여론이 악화되고 있을 때였다. 법무사 K에게 고등학교 후배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찾아왔다. “창피한 일인데,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고…. 형이 좀 도와 줘요.” 후배는 백화점 매장에서 연봉 3천5백만 원의 영업직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 동생이 며칠 전 강도강간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했다. 요령부득으로 들려주는 후배의 말을 정리하면서 대충 무슨 사건인지는 알아들었지만 직감적으로 자기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아서 K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안이 어쨌든 때가 좋지 않았다.
“아는 변호사 있으면 소개를 좀….” 눈치가 잽싼 그 후배는 그런 선배의 심중을 벌써 읽어낸 모양으로 말을 슬그머니 돌렸다. K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어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변호사를 소개해주었다. 사실 그런 형사사건에서 법무사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한 2개월쯤 지났을까. 그 후배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서류뭉치를 들고 있었다.
“일이 완전히 꼬였어요. 형, 이 사건 좀 살펴보세요.” 그가 내민 서류는 1심 형사기록이었다. 후배를 흘깃 쳐다보며 법무사 K는 서류의 맨 뒤에 끼어져 있는 판결문을 펼쳤다. 징역 3년, 특수강도강간죄(미수)였다. “이젠 변호사도 믿을 수가 없어요. 형이 항소이유서를 좀 써주세요.” 뭘 믿을 수가 없다는 건지 후배는 한참 횡설수설하며 불평을 쏟아놓았다. 후배가 돌아가자 어쩐 일인가 싶어 K는 즉시 기록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10월 중순이었다. 35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피고인은 1주일마다 쉬는 백화점 휴일 전날 일을 마치자마자 친구 한 명을 불러내 밤을 새며 술을 마셨다. 손님들이 원하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업무에 스트레스가 꽤 쌓이는 편이었다. 그렇게 떠들고 마시며 밤을 꼬박 샌 뒤 피고인은 그 다음 날 아침 6~7시경 술집을 나섰다. 이미 다리가 풀려 걸음은 제멋대로였다.
피고인이 자기 동네 초입을 들어선지 1, 2분쯤 지났을까, 어떤 집의 샛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무엇에 빨려든 것처럼 무작정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집 가장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고 그의 처와 젖먹이 아이가 큰 방에서, 10살과 9살짜리 딸이 그 옆방에서 잠자고 있었다.
피고인은 현관 입구의 건조대에 널려 있는 소아용 내의를 걷어 얼굴을 가린 뒤 주방에서 식칼과 투명테이프를 찾아들고 방으로 들어가 여자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칼을 겨눴다. 여자가 잠에서 깨어나 놀란 목소리로 “우린 돈이 없어요.”라고 울먹였다. 피고인은 칼로 위협하며 “정말 돈이 없어?”라고 겁을 준 뒤 이불을 걷고 여자의 배에 올라타 팬티를 벗겨 내렸다.
그때였다. 옆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방의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옆방의 딸들이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큰 딸이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곁에 있던 작은 딸은 “아저씨, 왜 쇼 하세요?”라고 힐난했다. 피고인은 딸들의 출현에 놀라서 하던 동작을 멈추고 슬금슬금 그 방에서 물러나와 도망을 쳤다.

이상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에 적힌 사건의 전체 개요였다. 법원은 검찰의 공소내용을 그대로 인정하여 피고인에게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강도강간 등)’이라는 비교적 긴 죄명을 인정하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피해자 진술 오락가락, 지문 없는 흉기 등 증거도 부족해

K는 1심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에 걸쳐 읽었지만 판결에 명시해 놓은 증거는 피해자인 여자와 그 딸들의 진술 외에 국과수의 감정결과 피고인의 지문이 나오지 않은 식칼과 투명테이프가 전부였다. 성폭력죄나 강도죄의 실행의 착수는 폭행, 협박을 시작할 때이므로 공소장이나 판결이유만 가지고 본다면 강도강간죄(미수)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럼에도 증거가 시원찮은 데다 결과에 비해 너무 중형이 선고되지 않았나 싶었다.  
K는 수사와 공판기록에서 피해자인 여자의 진술이 자꾸 바뀌는 과정을 유심히 살폈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인 증거가 바로 피해자인 여자의 진술인데 경찰의 1차 신문조서에는 여자가 "우린 돈이 없어요."라며 울먹였을 때 피고인이 "정말 돈이 없어?"라고 하지 않고 ‘그 말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고 적혀 있었다. 피해자에게 칼을 겨누며 "정말 돈이 없어?"라고 했다면 재물강취의 고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첫 진술에는 없었던 이 말이 어떻게 2차 신문조서에는 기록된 것일까. 2차 신문은 피해자 가족이 피고인의 누나에게 합의금으로 5000만 원을 요구하던 무렵에 있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피해자는 피고인이 칼을 겨누고 투명테이프를 뜯어 자기의 입을 막으려 했다고 진술했다가 감식결과 칼과 테이프에서 지문을 찾아내지 못하자 이번에는 당시 피고인이 면장갑을 꼈다고 진술을 바꿨다. 면장갑을 낀 채 투명테이프를 어떻게 벗겼다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검찰송치 후에는, “돈을 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위협했다는 말이 추가됐다.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니까 보복이 두려웠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법원의 증인신문에서 피해자는 “칼끝으로 목을 겨눈 채 돈을 요구했다.”거나 자신의 큰 딸이 “엄마, 아저씨가 엄마 목에 칼도 들이밀고, 팬티도 내렸잖아. 팬티가 이만큼 내려왔잖아.”라는 노골적인 진술이 또 추가되었다.
피고인이 술 친구와 헤어질 때에는 만취상태였으나 얼마동안 바깥바람을 쐰 뒤 범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긴장 때문에 어느 정도 의식이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경찰과 법정에서 진술한 것을 보면 자신이 칼과 테이프를 들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들의 속옷을 얼굴에 덮어쓴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고를 당하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경찰과 끈을 이으려고 애를 쓴다. 피고인이 구속되자 그의 누나도 아는 사람을 통해 담당 경찰관에게 선처를 부탁했던 모양이었다. 빨리 조사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해야지. 그리 중한 사건도 아닌데 자꾸 부인만 하면 어떡해. 그러면서 담당형사는 그 지인에게 자백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래서 피고인은 취중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칼과 투명테이프를 들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해버렸다.

10살 여자아이의 “아저씨, 누구세요?”, 과연 성폭력 상황에서 한 말?

그때까지 그가 진술했던 내용을 정리해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방에 들어갔는데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눈을 번쩍 뜨는 바람에 깜짝 놀라 동작을 멈췄다. 여자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며 “우린 돈이 없어요. 파산상태여서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할 때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서 있는데 옆방의 문이 열리며 그 집 딸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피고인은 더 이상 서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 같아서 방을 나가 줄행랑을 쳤다. 한참 가다보니 아이들의 옷을 그냥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비로소 그것을 벗었다. 이것이 그가 허위자백(피고인의 진술로는)을 하기 전까지 진술했던 내용이었다. 한참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피고인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범행에 사용했던 아이들의 옷을 집 앞에서 주웠다며 피해자에게 건네주고 나온 것은 피고인의 진술이나 기록의 내용이 일치했다. 그때, K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그 집 큰 딸이 피고인에게 했다는 말이었다. 요즘 유치원에서도 남녀의 성기가 그려진 그림책을 펴놓고 성교육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낯선 사람이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도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고 소리치는 여자아이들도 꽤 많다고 한다. 그런데 열 살이면 초등학교 3~4학년이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 가방에는 화장용 백이 들어있고 인터넷이나 친구들을 통해 이미 성에 관해 어느 정도 눈이 뜰 나이다. 초경을 시작한 아이도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요즘 아이들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낯선 남자가 당시 자신의 엄마에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과연 그 상황에서 잠에서 갓 깬 10살짜리 여자아이가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물을 수 있을까. 아마 십중팔구, 고함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전혀 상황에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말은 경찰의 신문조서, 공소장, 판결문에 그대로 인용되어 유죄의 보강증거로 사용되고 있었다.
K는 문득 혹 이 말이 이 사건의 아킬레스건은 아닐까 생각하며 항소이유서에 들어갈 내용을 대략 간추려 보았다. 먼저 증거부분을 정리해 나갔으나 상황마다 말을 바꾸는 피해자의 진술, 그리고 그 딸들이 했다는 두 마디, 그게 전부였다. 앞에 언급한 대로 경찰이 부엌 냉장고 위에서 수거했다는 식칼과 투명테이프에는 피고인의 지문이 없었다. 그가 범행 때 꼈다는 면장갑은 찾지도 못했다.
독신 청년에게 연봉 3500만 원은 그리 적은 돈이 아니다. 남의 집에 칼을 들고 들어가 금품을 강취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다는 말이다. K는 피고인의 지문 하나 묻지 않은 칼과 투명 테이프를 앞에 놓고 강도로 몬 것은 너무 심하지 않으냐고 따지고 들었다.
또한, 피해자의 큰 딸의 말, “아저씨 누구세요?”에 맞는 상황을 추론해서 적었다. 아이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피고인의 손에 식칼이나 투명테이프는 들려있지 않았을 것이다. 피고인은 구속되어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10여 년 근무했던 직장에서 이 일을 알면 어떻게 할까, 그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자백해. 별거 아냐. 사건을 종결하고 빨리 직장에 복귀해야지. 이런 형사의 회유로 대충 자백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항소이유서 - 당시 상황 추측하면 피고인은 ‘주거침입죄’ 정도

그렇다면 새벽에 남편을 배웅한 후 깜빡 새벽잠이 들었던 피해자는 피고인이 방에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껴 눈을 떴고, 순간적으로 도둑이 들었다고 판단한 피해자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아저씨, 우린 돈이 없어요.”라고 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여자가 눈을 뜨고 떠들자 피고인 역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사이, 엄마의 겁에 질린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문을 열고 엄마 방으로 건너왔다. 웬 낯선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본 큰 아이는(10월 중순의 일출시간은 6시 40분 전후이므로 방안은 이때쯤 주위의 물체를 분간할 정도로 밝았을 것이다.) 놀란 기색으로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했던 것 같다.    이때 아이들 옷을 머리에 덮어쓰고 입을 가린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서있는 피고인에게 9살짜리 둘째 딸이 “아저씨, 왜 쇼를 하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여자가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당황했던 피고인은 아이들이 나타나자 더욱 안절부절 못하고 “그냥 가겠다.”라며 도망을 치지 않았을까. 당황한 나머지 아이들의 옷가지도 그냥 뒤집어 쓴 채 도망했던 피고인이 식칼과 투명테이프를 냉장고 위에 두고 나왔다는 것은 사리에도 전혀 맞지 않았다.
그리고 1심판결이 선고되기 직전에 피고인의 누나와 피해자 간에 1500만 원으로 합의를 본 사실, 이미 피고인은 이 사건 때문에 연봉 3,500만 원짜리 직장을 잃게 됐다는 사실도 강조를 했다. 대충 이렇게 항소이유서를 완성하고 나니 이것을 재판부에 낼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피고인이 항소를 했고, 항소이유서는 항소인이나 변호인이 제출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법무사 K는 하는 수 없이 피고인의 누나를 교도소로 보냈다. 이 내용을 피고인의 자필로 다시 쓰는 수밖에 없었다.
한 달 후, 항소심 재판부는 마침내 강도 부분에 대하여 무죄를 인정하면서 피고인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죄명도 ‘특수강도강간’에서 ‘주거침입 강간’으로 바뀌었다. 재물강취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도 역시 판결문에 “아저씨, 누구세요?”라는 큰 딸의 진술을 유죄인정의 근거로 명시하고 있었다. 자칫 성폭력의 혐의도 희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K가 추측한 대로였다면 피고인은 주거침입죄 정도의 혐의밖에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정황으로 봐서 피고인이 성폭행을 목적으로 그 집에 들어간 것은 맞는 것 같았다. 비록 피고인 입장에서 항소이유서를 작성했지만, 사실 사건을 직접 심리하고 신문한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판단이 가장 정확할 것이라는 인식은 K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선입견 때문에 상황판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과 여부에 불구하고 기분 좋은 사건은 아니었으므로 K는 항소이유서 부본과 판결문을 파일 깊숙이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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